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 올레심마니 :: '분류 전체보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51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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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결혼의 목적과 동성애이 도덕적 지위에 관한 도덕적, 종교적 논란에 개입하지 않고 동성혼을 인정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할 것이고,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선택을 근거로 동성혼을 지지합니다. 즉, 개인적으로 게이나

레즈비언 관계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사람들은 저마다 결혼 상대를 자유롭게 고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성에게만 결혼을 

허용하고 동성에게는 허용하지 않는다면 게이와 레즈비언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을 부정하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국가와 동성혼을 인정해야 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면, 결혼의 목적과 결혼이 추구하는 선에 관한

논란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유주의적 공적 이성의 테두리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적 판단을 배제한 채 동성혼에 찬성할 수는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사회조직의 목적을 논의하는 것은 그 조직이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입니다. 

동성애 논쟁은 근본적으로 게이와 레즈비언의 결합이 국가가 승인한 혼인에 따르는 영광과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에 관한 논쟁입니다. 그렇다면 그 바탕이 되는 도덕적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이해하려면, 국가가 결혼에 관해 채택할 수 있는 정책은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혼인만 인정하는 전통적인 정책을 채택하든가, 이미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듯 동성혼을 남녀간 혼인과 

똑같이 인정하든가, 어떤 혼인도 인정하지 않은 채 그 일을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으로 돌리든가, 세가지 정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아요.

1. 남자와 여자의 혼인만 인정한다.

2.동성혼과 이성혼을 인정한다.

3.어떤 종류의 혼인도 인정하지 않고, 그 일을 사적인 영역으로 돌린다.

국가는 혼인법 외에도 시민결합법이나 가정동반자법을 만들어, 혼인하지 않고 동거하면서 법 체제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법적 보호, 상속권, 병원 방문권리, 양육권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많은 주가 게이와 레즈비언을 상대로 이런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2003년에는 미국의 주 가운데 매사추세츠가 대법원 판결에 따라 최초로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했습니다. 

2003년 메사추세츠의 대법원 판사인 마셜은 많은 사람이 혼인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한정되야 하며, 동간간의 행위는

부도덕하다는 뿌리 깊은 종교적.도덕적,윤리적 신념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이 동성끼리도 혼인할 권리가 있으며, 동성애자도 이성애자 이웃과 다르지 않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강한 종교적.도덕적.윤리적 신념을 갖고 있다. 그 

어느 관점도 우리 앞에 놓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우리 의무는 모든 사람의 자유를 정의하는 것이지 우리만의 도덕률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동성혼 논쟁의 쟁점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동성 결합이 공동체에게 영광과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즉 결합이라는

사회제도의 목적을 이행하는가 하는 점이죠.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하자면, 공직과 영광의 공정한 분배가 쟁점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승인의 문제입니다. 

캘리포니아주의 최초 동성혼커플

매사추세츠 법원은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다부 또는 다처혼인을 인정할 의도는 분명히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특정한 부부관계를 사회적으로 승인하게 마련이라는 생각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혼인이나 혼인제를 폐지하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마셜 대법원장은 국가가 승인하는 혼인을 폐지하기보다는 전통적 혼인을 동성 배우자를 포함하는 혼인으로 확대하자고 주장합니다. 마셜이 보기엔 혼인은 합의한 성인간의 사적인 약속이라기 보다는 

공적인 인정과 승인으로 본 것입니다. 

동성혼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은 결혼의 일차 목적은 출산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의하면 동성부부는 출산을 할 수 없으므로 결혼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지요. 

여기에 대해 마셜의 견해는 출산이 결혼의 일차 목적이라는 주장부터 반박합니다. 현재 국가가 관장하는 혼인은 출산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즉, 성관계로 아이를 가질 능력이나 의향을 묻지 않는것이고 혼인해 한 번도 합방하지 

않았거나 합방할 계획이 없는 사람들도 계속 혼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게이와 레즈비언 관계의 도덕적 지위는 무엇인가요? 마셜은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누가 결혼할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려면, 결혼의 목적과 결혼이 칭송하는 미덕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의하면 공리주의적 이해 방식은 두 가지 단점이 있는데 첫째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든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간행위의 가치를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획일화하면서 그것들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점이죠.

대만 동성혼 합헌판결

이 책의 결론은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고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의레 생기게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 올레심마니의 마이클 샌델교수의 명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소개와 견해를 마치고 다음엔 다른 주제로 여러분과 소통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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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미국대선에서 바이든에 진 것으로 나온 트럼프는 미국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은 First America를 외치며 4년전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되더니 급기야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후보를 제치고 미국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어느 누구도 심지어 언로에서 조차 비정치가였던 트럼프의 당선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미국우선주의 정책을 등에 엎고 당당히 미국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트럼프는 해외에 나가 있던 미국기업들을 불러 들이기위해 각종 세금감면정책과 자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의 영주조건을

까다롭게 바꾸는 등 미국만을 위한 정책일변도로 나가면서 외국과 심지어 한국,일본 등 우방국에게도 지나치다 할 정도로 무역관례를 무시하면서 까지 자국산업육성에만 힘쓰는 정책을 구사하여 많은 우방국들을 당혹케 했습니다.

급기야 한국에게는 미군 주둔 분담금을 대폭 올리면서 이행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들이대는 등 국제적 

질서와 동맹국과의 외교결례 등을 야기시키면서까지 미국만을 위한 이익에만 매달리는 정책을 구사하게 되죠.

미국인이 이방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이유는 비단 외국인 이주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에는 자본과 재화가 사람보다 더 쉽게 국경을 넘지요.

미국민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산을 사라는 애국심 마케팅을 보자면 일제 도요타나 한국산 현대보다는 포드 자동차를 사야 애국인인가요? 자동차를 비롯해 점점 더 많은 제품이 세계적인 공급망으로 생산되다 보니, 정확히 어떤 차를 미국산이라고 해야 할지 분명치 않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가족, 친구, 동료를 더 생각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이들도 인정합니다. 다음은 남북전쟁때 남부군 사령관인 로버트 리에 대한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로보트 리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연방군 장교였습니다. 그는 남부 주들의 연방탈퇴를 반대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탈퇴는 반역이였죠. 전운이 감돌자 당시 링컨 대통령은 리에게 연방군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리는 거절합니다. 고향인 남부 버지니아에 대한 의무가 연방에 대한 의무보다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예제에는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남부연합을 지지하는 명분에는 연방 탈퇴만이 아니라 노예제 존속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리의 선택을 옹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딜레마에 빠뜨린 충성심을 존중하지 않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부당한 명분을 고수하는 태도를 존경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도 충성의 도덕성을 따져야 하는지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리의 난처함을 단지 심리적인 것으로만 해석하면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리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고민에 드러난 인격에 끌려 리 같은 사람을 동정할 뿐 아니라 존경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로버트 리의 결정에 동의하나요? 아니면 반대하나요? 

다음편에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토론장인 동성애에 대해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여러출판사에서 출판되고 있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사이트를 방문하시어 자신에게 맞는

책을 골라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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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사죄와 손해배상

2020. 11. 26. 18:35 | Posted by 마음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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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사에 대해 여러차례 갈들을 겪은 바 있습니다. 사죄로 얼룩진 정치의 상당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자행된 만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 책임을 인정해, 생존자와 이스라엘을 상대로 수백억 달러 상당의 배상금을 지출했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 독일 정치 지도자들은 공개 사죄하면서 나치에 대한 책임을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인정했습니다. 2000년에는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이 이스라엘 국회연설에서 유대인 대학살을 사죄하고 독일인이 한 일을 용서해달라고 했죠. 

반면, 일본은 전쟁에서 자행된 만행을 사죄하는데 인색했습니다. 1930-40년대에 일본은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여성과 여자아이들을 강제로 끌어가 위안부로 이용했습니다. 심지어 전쟁중 동남아에 거주하던 네덜란드나 유럽여성들도 성

노예생활을 강요당했다는 증언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7년 아베신조 일본총리는 일본군은 여성을 성 노예로 동원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고 여기에 대해 미국 의회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 여성을 노예로 삼은 일본군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또다른 사죄 논란은 토착민에 대한 부당한 역사적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여러 인종의 피가 섞인 원주민 아이들이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 백인 가정이나 정착촌에 살아야 했습니다. 보통 이 혼혈아이들은 엄마가 원주민, 아빠가 백인인 경우가 대다수였죠. 아이들을 백인 사회에 동화시키고 원주민문화를 빨리 없애기 위한 정책이였습니다. 

이에 대해 199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인권단체가 이러한 정책을 잔혹행위라고 지적하고, 국가 사죄의 날을 지정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존 하워드 당시 총리는 공식 사죄를 거부합니다. 그러다가 2008년 케빈 러드총리가 원주민에게 공식사죄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크게 대두되는 사죄는 노예제 유산과 관련됩니다. 남북전쟁 후 정부는 해방된 노예에게 땅 40에어커와 노새 한마리를 제공한다고 약속했지만, 결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의 흑인에 대한 배상운동은 제자리걸음인 반면

공식 사죄만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죄는 결국 부당행위를 어느정도 책임지는 것이며, 내가 하지 않은 행위는 사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라는 숙제가 남습니다. 

노예제에 대한 배상 문제를 둘러싼 미국 내 논쟁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노예제에 대한 배상에 대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앞선 세대가 한 일을 내가 보상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부는 시민에게서 돈을 가져와야하고, 오늘날 살아 있는 시민 가운데 노예제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다음에 이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올레심마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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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보다 더 숭고하고 까다롭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어느 모로 보다 경제와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어느 모로보나 경제와 다릅니다. 정치의 목적은 단지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공정한 규칙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고, 

좋은 삶의 본질과 인간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찬양하는 시민권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여성과 노예는 자격에서 제외였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시민이 되기에 적절치 않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얘기죠.

그런데 이 부당함은 아리스토텔렛가 그런 주장을 한 뒤로도 2천여년 이상 지속됩니다. 미국에서도 노예제도는 1865년까지 폐지되지 않았고 여성은 1920년에야 비로소 투표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당함이 끈질기게 이어졌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부당함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용서되지는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그의 노예제 옹호론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그의 정치론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입니다. 권리할당이란 사회조직의 텔로스를 확인한 뒤에 그것과 관련한 역할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 그에게 본성을 실현할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제 몫을 준다는 것은 그들의 자격에

맞는 공직과 영광을 주고 본성에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뜻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가 정당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노예가 꼭 필요하고 누군가 노예로 타고나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시민들이 함께 모여 공동선을 심사숙고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 집안일을 돌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노예제가 정당하려면 천성적으로 그 역할에 적합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태어나며 이들은 육체와 영혼이 다르듯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노예로 태어나,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다음편에서는 과거사 관련 사죄에 대해 논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용어자체가 난해하지만, 살아가면서 매 일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면서 살게 됩니다. 

제가 보는 정의란 무엇인가외에도 여러 출판사에 출시된 책자들이 있는데,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설명서를 보시고

취향에 맞는 책을 선정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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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홉우드는 부유한 집안출신이 아닙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 지역 전문대학, 그리고

새크라멘토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뒤 텍사스의 최고이며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텔사스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그는 입학시험도 잘 보았는데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백인 여성인 홉우드는 입학을 거절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격생 중에는 홉우드보다 대학 성적은 물론이고 입학시험 점수도 낮은 흑인과 멕시코계 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학교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대학 성적과 입학시험 점수가 홉우드와 비슷한 소수집단 학생들은 전원 합격했습니다. 홉우드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자신은 차별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종과 민족을 고려하는 이유 하나는 표준화된 시험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일부 연구결과에 따르면 표준화된 시험에서, 계층간 경제적 수준을 고려해도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전반적으로 더 낮은 점수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수집단우대정책과 관련한 진짜 논쟁은 나머지 두 가지 이유인 보상논리와 다양성 논리에서 일어납니다.

보상논리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을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행위로 봅니다. 소수집단 학생들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는

처지에 몰아넣은 역사적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우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

소수집단우대정책의 수혜자 가운데 상당수가 중산층 소수집단 학생들로, 이들은 도심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닉 젋은이들이 겪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풍요로운 휴스턴 교외에 사는 흑인 학생이 그들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셰릴

홉우드보다 더 큰 혜택을 누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입학에서 혜택을 받은 소수집단 학생이 개인적으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는지를 증명하는 문제와는 무관합니다 .다양성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은입학 허가를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봅니다. 

다양성이란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논리입니다. 이때의 공동선은 학교의 공동선이자 사회의 공동선입니다.

다양성 논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박을 합니다. 하나는 현실적 반박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 반박입니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품습니다. 인종별 우대정책은 다원화 사회를 활성화하거나 편견과 불평등을 줄이기보다는 소수집단 학생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모든 집단이 인종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며, 인종간의 긴장을

높이고, 자신도 행운을 누려야 할 사람이라고 느끼는 백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부당하다는 게 아니라, 그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고 득보다는 해가 많으리라는 주장입니다.

또다른 기여 입학생을 생각해봅니다. 기여 입학생이란 지원자 가운데 졸업생의 자녀는 아니지만, 학교에 상당한 기부금을 내놓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한 부모의 자녀를 말합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이 학업 성적과 시험점수가 낮아도 이러한

학생들을 받아들입니다. 

이 제도는 공정할까요? 대학이 원하는 능력이란 어떤 식으로든 대학의 사명에 기여하는 역량을 뜻한다고 본다면, 답은 

그렇다가 될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이든, 대학은 그것을 수행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정의에 관한 논쟁을 영광, 미덕, 선의 의미에 관한 논의에 묶어두는 것은 대책 없는 의견 차이를 봉합하는 비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올레 심마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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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가 결혼하지 않은 채 정자를 기증받아 아기를 낳아 비혼모가 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국에서는 결혼한 사람만 시험관이 가능하고 모든 게 불법이었다고 말했죠. 

사유리의 말대로 그녀가 일본에서 받은 시험관 시술은 한국에서는 사실상 부부만 가능합니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기증자의 동의를 구하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비혼 여성도 시술을 받을 수 있지만 모자보건법은 시험관 시술의 대상을 난임 부부로 정하고 있어 사실상 비혼여성의 정자기증은 한국에서는 힘들다고 봐야합니다.

이와 더불어 영국에서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다가 남성으로 전환하여 남성성으로 바꾼상태에서 뒤늦게 사유리처럼

정자를 기증받아 아일를 낳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을 아빠가 아닌 엄마로 표기한 것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여 또다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국 데일메일에 다르면 영국 가디언 프레디 맥코넬은 아이를 출생하며 아버지 혹은 부모로 

등록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문제의 당사자인 맥코넬은 여자로 태어났지만, 현재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로 살고 있다고 하네요. 그의 경우, 법적으로 이미 남성으로 변경된 상황에서 아이를 출산한 상태인데 출산 담당자는 출산을 하는 사람은 어머니로 등록하게 돼 있다고 말했답니다. 이미 진행된 두차례의 법정 다툼에서 진 맥코넬은 자신의 의지를 꺽지않고 대법원에 신청서를 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논제임에 틀림없겠습니다. 

다음은 대가를 받는 임신은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윌리엄 스턴과 엘리자베스 스턴은 뉴저지 테너플라이에 사는 부부로, 남편은 생화학자이고 아내는 소아과 의사입니다. 두 사람은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아내가 다발성경화증을 앓고 있어 아이를 가지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불임센터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대리출산을 알선해주어 대리모광고를 통해 구합니다. 여기서 대리모란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해주는 여자입니다.

최종적으로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환경미화원의 아내로 당시 스물아홉의 메리 베스 화이트헤드가 대리모가 됩니다. 

메리 베스는 몇차례 인공수정끝에 임신을 했고, 1986 3월 여자아이를 출산합니다.  스턴부부는 곧 입양할 딸을 생각하며, 아이에게 멜리사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런데 대리모가 마침 출산을 하고보니 아이와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물론 아이에 대한 양육권 다툼이 법원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대리모댓가의 1만달러는 서비스(임신)에 지급한 것이지, 생산물(아이)에 지급한 것이 아닙니다. 즉, 대리출산이 아이를

파는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옳지않는 것이죠. 즉, 아이는 의뢰인의 정자로 생겼으니 처음부터 그의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대리모의 상고로 대법원까지 가게 됩니다. 법원은 출산한 아이의 양육권을 윌리엄 스턴부부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대리모보다는 아이를 위해서 스턴부부밑에 크는 것이 보다 나은 환경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대신 대리모인 메리베스 화이트헤드에게는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문권을 부여하게 됩니다.

미법원은 아무리 성인간의 합의에 의한 계약이였다고 하더라도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돈으로 살 수없는 것이 있게 마련이라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대리모 사건은 누가 옳다는 것인가요? 계약을 인정한 1심법원인가, 계약을 무효로 만든

상급법원인가요?  상기 대리모 문제는 윤리적인 문제가 동반되는데 즉, 친아빠는 정자를 제공할 뿐이지만, 대리모는 자궁과 난자를 제공하므로 엄연히 친엄마가 맞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학이 보다 진보하여 지금의 대리모는 단지, 자궁만을 빌려주는 역할만 수행하게 되어 부모가 될 사람은 자기 아이를 임신할 여성의 유전적 특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고 윤리적으로도 보다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지만,이런 대리출산으로도 도덕문제가 해결되는것은 아닙니다. 자궁대리모는 난자까지 제공하는 대리모보다 아이에 대한 집착이 분명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에 대한 소유권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는가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죠. 

인도의 서부도시 아난드는 유급임신 즉, 대리모의 도시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고 주요 고객은 영국, 미국, 타이완 등의

불임부부들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과연

존재할까요? 이상, 올레심마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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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의 논쟁

2020. 11. 18. 14:28 | Posted by 마음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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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일흔아홉살의 잭 케보키언 박사가 삶을 마감하고 싶어 하는 말기환자에게 치사 약물을 투여한 죄로 미시간 교도소에서 8년간 복역하고 출소했습니다. 그는 가석방 조건으로 앞으로 환자의 자살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하죠.

죽음의 의사로 알려진 케보키언 박사는 1990년대에 안락사 허용 운동을 벌였고, 자신의 설교를 실천에 옮기면서 환자

130명을 도와 안락사시켰습니다. 그런 와중에 CBS텔레비젼 프로그램인 60분에 비디오 테이프 하나를 보낸 뒤에 비로소

2급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됩니다. 테이프에는 루게릭병을 앓는 남자에게 그가 직접 치사 약물을 주사하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오리건주 워싱터 주를 제외하고는 아직 많은 주에서 안락사는 불법입니다. 다른 많은 나라도 마찬가지며, 몇 나라만이 현재 허용한 상태입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안락사를 금지한 법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내 삶이 내 것이라면, 내게는 그것을 포기할 자유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내 동의를 받아 누군가가 내 죽음을 돕는다면, 국가는 여기에 간섭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락사 허용에 찬성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유한다거나 우리 삶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락사에 찬성하는 사람 다수가 소유권에 호소하기보다는 존엄과 연민을 내세웁니다.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연명하기보다 스스로 죽음을 앞당길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통상 인간의 목숨을 보전할의무가 있다고 믿는 사람조차 경우에 따라서는 의무보다는 연민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말기 환자의 경우, 안락사를 지지하는 자유지상주의 논리는 연민의 논리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자기소유라는 개념의 도덕적 효력을 흑정하기 위해 말기 환자가 등장하지 않는 안락사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솔직히 조금 특이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특이하기 때문에 , 존엄이나 연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지상주의 논리 자체만을 평가할 수있습니다. 

또한가지 사례로, 2001년 독일의 로텐부르크라는 마을에서 이상한 만남이 성사됩니다.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마흔세 살의 베른트위르겐  브란데스는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힐 의향이 있는 사람을 찾는 인터넷 광고에 응합니다.

광고를 올린 사람은 컴퓨터 기술자인 마흔둘의 아민 마이베스였죠. 마이베스는 금전적 보상없이 체험만 제공한다고 했는데 약 200여명이 광고에 반응을 보였고 브란데스가 마이베스를 직접 만나서 그의 제안을 듣고 승낙합니다.

결국 아미베스는 이 손님을 죽여 토막낸 뒤에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체포당시엔 이미 20킬로그램이나 요리해서 먹었던 

것으로 조사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당시 독일법으로는 식인행위에 대한 처벌하는 법은 없었고, 피고측은 가해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죠.

이유는 희생자가 자기 죽음에 기꺼이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원은 1심에서 우발적 살인죄를 적용하여 8년형에 

처했지만 결국 법원은 1심형이 너무 형이 가볍다고 판단하여 종신형에 처결하게 됩니다.

성인들의 합의로 이루어진 식인행위는 자기소유라는 자유지상주의 원칙과 여기서 나온 정의에 관한 생각을 시험하는 궁극적인 시험대입니다.  이 사건은 안락사에 대한 극단적 예에 속합니다. 그러나 말기 환자의 고통을 완화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 신체와 목숨은 우리 소유이며 따라서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근거로만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정의란 정말 무엇일까요? 다음에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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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권리와 공리주의

2020. 11. 17. 20:44 | Posted by 마음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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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공리주의의 문제점으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전체의 만족의 총합에만 두고

관심을 두고 개인의 권리는 무시한다는 것이죠. 공리주의자들에게 개인은 단지 사람들의 선호도를 더할 때 계산되는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우리가 예의와 존중의 전형으로 여기는 것을

어기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다룰 수 도 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골로세움이라는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사자 우리에게 던져놓고 군중이 그것을 보고 즐기게 

했습니다. 이때 공리주의자라면 어떤 계산을 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자에 물어뜯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느끼는 집단적 황홀경을 생각해 보세요. 만약 수많은 

로마인이 그 살벌한 장면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근거로 그 행위를 비난할까요?

공리주의자들은 그 같은 게임이 천박한 습성을 키우고 로마 거리에서 폭력을 더욱 양산하리라고 우려하거나, 앞으로

희생자가 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젠가는 자기들도 사자 우리에 던져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확산되리라고 걱정할 것입니다. 만약 그 공포가 심각해지면 게임이 제공하는 쾌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설 것이고, 그러면 공리주의자들은 게임을 금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재미삼아 그리스도인을 살벌한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를 고작 그런 계산에 근거해 금지

한다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이 빠진 게 아닐까요?

비슷한 의문은 오늘날에도 야기되고 있습니다. 테러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정당화 할수 있을까요?

시한폭탄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당신은 미국중앙정보국 지역국장이고, 어느날 테러 용의자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이사람이 언젠가는 맨하탄을 폭파할 핵무기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가 이미 폭탄을 설치했다고 의심할 근거도 있습니다. 시간은 자꾸가는데 용의자는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며 폭탄의 위치를 실토하지 않을 경우,

그가 폭탄설치된 장소를 말할때 까지 고문을 해야 옳을까요?

공리주의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문은 용의자에게 고통을 주지만, 폭탄이 터지면 죄 없는 수천 명의 목숨이 날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공리주의자들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줄 지언정 여러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고문해도 된다는 논리를 펼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리처드 체니 전 미국부통령이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에게 강력한 고문기술을 사용한다면 이후 미국을 겨냥한 테러 공격을 막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공리주의 논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리주의자가 고문을 선호한다고는 할 수 없지요. 오히려 심한 고문에 의한 자백은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니기에 고문이 효과가 없다는 주장도 재기합니다. 또한 우리가 고문을 한다면 우리쪽 포로도 상대측으로 부터 더욱 

가혹한 고문을 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고문하는 행위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지 않는것입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이익보다는 해가 많아서 부정적 결과를 낳으리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맨하탄 야경

또 한편에서는 고문을 원칙적으로 반대합니다. 고문이 인권을 침해하고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을 짓밟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는 공리주에게 근거하지 않습니다.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은 공리를 넘어서는 도덕에 기초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말이 옳다면 벤담의 철학은 잘못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행복을 계량하고 통합하고 계산하는 데 기초가 되는 도덕 과학을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기호는 동등하게 계산됩니다. 그리고 도덕적 선택을 과학으로 만들어준다는 약속은 오늘날 경제 분야의 논리적 사고에 

상당한 밑거름이 됩니다 

다음에 이어 이번 주제를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올레심마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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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철로상황의 가설이 아닌,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예시를 소재로 올려 보겠습니다. 

2005년 6워, 미국 특수부대 실(SEAL)소속의 마커스 루트렐 하사와 수병 세 명이 파키스탄 국경과 가까운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정찰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당시 적색수배경보 1위인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탈레반 지도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정보에 따르면 탈레반 지도자는 150명 내외의 중무장한 세력을 지휘하면서 험한 산악지대의 어느 마을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고 미군 특수부대는 이를 찾아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였죠. 

특수부대가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직후, 아프가니스탄 농부 두 명이 약 100마리의 염소를 몰고 

나타납니다. 일행에는 열네 살가량의 남자아이도 있었죠. 무두 비무장한 사람들이였습니다. 

당시 미특수부대원들은 이들과 맞닻게 되자 큰 딜레마에 봉착하게 됩니다. 비록 이들은 비무장한 민간인으로 보였지만,

이들을 놓아주면 미군의 소재를 탈레반에게 알려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민간인으로 보이는 이들을 죽이자니 양심이 꺼렸던 것입니다.

미군측은 양갈래의 의견으로 갈렸죠. 한 사람은 염소치기들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고 맡은 비밀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죠. 군대임무수행을 위해선 염소치기들을 없애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하지만, 루트렐하사는 양심상 그들을 죽이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풀어주자는 쪽에 표를 던집니다. 

결국 이들은 염소치기들을 풀어주게 되는데 한 시간반쯤 되어서 미군 특수부대원들은 100여명의 무장한 탈레반에게 포위되어 격렬한 총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와중에 부대원 세 명이 전사하고 미군들을 구하러 온 미헬리콥터도 격추당하여 탑승객16명까지 몰살당하게 됩니다. 

천신만고끝에 중상을 입고 산 아래로 굴러떨어져 살아난 루트렐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11Km떨어진 어느 마을에 몸을 숨겨 겨우 구출되게 됩니다.

살아난 루트렐은 당시를 회상하며 염소치기를 죽이지 않는 쪽에 표를 던진 것에 후회를 합니다. 

이들이 직면했던 당시 딜레마가 그토록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중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풀어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당시를 회상하던 루트렐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그 비무장한 사람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아프카니스탄 염소치기

3명을 죽였다면 전우 셋과 그들을 구하러 온 미군 16명을 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염소치기들을 죽이는 것은 전차 

방향을 돌리는 일과 남자를 다리에 미는 일 중에 어느 경우와 비슷해 보입니다. 

루트렐이 위험을 예감하고도 비무장 민간인을 냉정하게 죽이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남자를 미는 경우에 다 가까울 것입니다. 하지만 비무장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을 죽이는 것이 남자를 다리에서 밀어야 한다는 주장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염소치기들은 죄 없는 민간인이 아니라 탈레반에 동조하는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염소치기들이 탈레반 동조자가 아닌 중립적인 사람들이거나 탈레반에 반대하지만 강요에 못 이겨 미군의 위치를 알려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염소치기들은 선량한 민간인들일 수 있지만, 이들이 탈레반의 고문으로 미군의 

위치를 발설하리라고 볼 수 있겠죠. 

상기와 같이 이러한 상황이라면 개인의 삶이나 공적인 영역에서 어떤 방식으로 도덕적 주장을 펴야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민주사회에서 삶은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에 관한 이견으로 가득할 수 있게 마련이죠 .

여러분은 상기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다음에는 다른 예시로 여러분과 함께 토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올레심마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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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철로를 이탈한 전차

2020. 11. 14. 13:30 | Posted by 마음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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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던진 질문에 대해 고민들 해보셨나요?? 대부분 다섯사람을 살려야지. 한사람은 미안하지만 희생되더라도 말이야.라고 . 저도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목숨을 구하는 행위에 제 선택을 걸었을 것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책에대한 상세설명나옵니다.

책에서는 다음 화제를 또 꺼냅니다. 여러분이 기관사가 아니라,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 있는 구경꾼입니다. 

이번에도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전차가 인부 다섯명을  치기 일보 직전입니다.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다가 문득 당신옆에 서 있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를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을 밀어 전차가 들어오는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하면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다섯 명은 목숨을 건질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의협심이 강해 당신이 직접 철로로 몸을 던질까 생각도 했지만, 전차를 멈추기에는 몸집이 너무 작았지요.

그렇다면 덩치 큰 남자를 철로로 미는 행위는 옳은 일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무고하게 철로로 미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다리 아래로 밀어 죽게 하는 행위는 비록 죄 없는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고 해도

끔찍한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애매한 도덕적 문제가 생깁니다.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사람을 구하는 첫 번째 예에서는

옳은 것 같던 원칙이 왜 두번째 예에서는 그렇지 않을까요?

첫 번째 예에서 우리 반응이 보여주듯이, 숫자가 중요하다면 즉, 한 사람보다는 다섯 사람을 구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면,

왜 이 원칙을 두 번째 예에 적용해 덩치 큰 남자를 밀면 안되는 것인가요? 

사람을 밀어서 죽게 하는 행위는 아무리 바람직한 이유를 든다고 해도 잔인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전차에 치여 죽게 하는 행위는 어떤가요?

사람을 미는 행위가 잘못인 이유는 다리에 서있는 남자의 의지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단지 거기 서 있을 뿐이였습니다.

하지만 비상 철로에서 일하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도 그저 자신의 맡은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였죠.

달려 오는 전차에 목숨을 던지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철로에 일하는 사람은 옆에 구경이나 하는 사람과 달리 위험을 

각오한 사람이라고 주장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목숨을 버려 다른 사람을 구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조항은 

해초에 포함되지 않았고 철로 인부라고 해서 다리 위의 구경꾼보다 자기 목숨을 희생할 의사가 더 많지도 않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쩌면 도덕적 차이는 두 경우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희생의 결과에 있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의도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전차 기관사라면, 진로를 바꾼 자신의 선택을 변호하면서 비상철로에 있던 인부를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인부 다섯명이 살고, 다른 한명의 인부도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하면 당신은 여전히

목적을 달성한 셈이죠.

또한 사람을 미는 경우도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다리에 있던 사람을 밀어 죽게 하는 것이 원래 목적은 아닙니다. 그 남자가 해야 할일은 전차를 막는 것이죠. 만약 그가 전차를 막고도 살았다면 여러분은 기뻐할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같은 원칙을 적용해야 할 듯합니다. 둘다 죄 없는 한 사람을 희생해 더 큰 인명 손실을 막겠다는 선택이 개입합니다. 남자를 다리 아래로 밀기를 꺼리는 당신의 태도는 소심증이며 극복해야 할 자세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밀어뜨리는 것은 전차의 방향을 바꾸어 죽게 하는 것보다 언뜻 보아 더 잔인해 보입니다. 

하지만, 옳은 일을 하기가 늘 쉽지가 않은 법이죠.

각 행위에서 도덕적 차이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 전차를 돌리는 행위는 옳고, 남자를 다리 밑으로 미는 행위는 옳지 않아 보일까요? 어떤 도덕적 딜레마는 도덕 원칙이 서로 충돌하면서 생깁니다. 여기의 예를 보면 하나는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이며, 또 하나는 아무리 명분이 옳다고 해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원칙입니다.

다음에는 다른 주제로 다시 여러분과 토의코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상세 설명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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