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 올레심마니 ::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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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홉우드는 부유한 집안출신이 아닙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혼자 힘으로 고등학교, 지역 전문대학, 그리고

새크라멘토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뒤 텍사스의 최고이며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텔사스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습니다. 그는 입학시험도 잘 보았는데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백인 여성인 홉우드는 입학을 거절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격생 중에는 홉우드보다 대학 성적은 물론이고 입학시험 점수도 낮은 흑인과 멕시코계 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학교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대학 성적과 입학시험 점수가 홉우드와 비슷한 소수집단 학생들은 전원 합격했습니다. 홉우드는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자신은 차별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종과 민족을 고려하는 이유 하나는 표준화된 시험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일부 연구결과에 따르면 표준화된 시험에서, 계층간 경제적 수준을 고려해도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전반적으로 더 낮은 점수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수집단우대정책과 관련한 진짜 논쟁은 나머지 두 가지 이유인 보상논리와 다양성 논리에서 일어납니다.

보상논리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을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행위로 봅니다. 소수집단 학생들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는

처지에 몰아넣은 역사적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우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

소수집단우대정책의 수혜자 가운데 상당수가 중산층 소수집단 학생들로, 이들은 도심 빈민가의 흑인과 히스패닉 젋은이들이 겪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풍요로운 휴스턴 교외에 사는 흑인 학생이 그들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셰릴

홉우드보다 더 큰 혜택을 누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입학에서 혜택을 받은 소수집단 학생이 개인적으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는지를 증명하는 문제와는 무관합니다 .다양성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은입학 허가를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봅니다. 

다양성이란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논리입니다. 이때의 공동선은 학교의 공동선이자 사회의 공동선입니다.

다양성 논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박을 합니다. 하나는 현실적 반박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 반박입니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품습니다. 인종별 우대정책은 다원화 사회를 활성화하거나 편견과 불평등을 줄이기보다는 소수집단 학생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모든 집단이 인종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며, 인종간의 긴장을

높이고, 자신도 행운을 누려야 할 사람이라고 느끼는 백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부당하다는 게 아니라, 그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고 득보다는 해가 많으리라는 주장입니다.

또다른 기여 입학생을 생각해봅니다. 기여 입학생이란 지원자 가운데 졸업생의 자녀는 아니지만, 학교에 상당한 기부금을 내놓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한 부모의 자녀를 말합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이 학업 성적과 시험점수가 낮아도 이러한

학생들을 받아들입니다. 

이 제도는 공정할까요? 대학이 원하는 능력이란 어떤 식으로든 대학의 사명에 기여하는 역량을 뜻한다고 본다면, 답은 

그렇다가 될 것입니다. 사명이 무엇이든, 대학은 그것을 수행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정의에 관한 논쟁을 영광, 미덕, 선의 의미에 관한 논의에 묶어두는 것은 대책 없는 의견 차이를 봉합하는 비결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올레 심마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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