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공리주의의 문제점으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전체의 만족의 총합에만 두고
관심을 두고 개인의 권리는 무시한다는 것이죠. 공리주의자들에게 개인은 단지 사람들의 선호도를 더할 때 계산되는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 논리를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우리가 예의와 존중의 전형으로 여기는 것을
어기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다룰 수 도 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골로세움이라는 원형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을 사자 우리에게 던져놓고 군중이 그것을 보고 즐기게
했습니다. 이때 공리주의자라면 어떤 계산을 할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자에 물어뜯기는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이 환호하며 느끼는 집단적 황홀경을 생각해 보세요. 만약 수많은
로마인이 그 살벌한 장면을 보며 쾌감을 느낀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근거로 그 행위를 비난할까요?
공리주의자들은 그 같은 게임이 천박한 습성을 키우고 로마 거리에서 폭력을 더욱 양산하리라고 우려하거나, 앞으로
희생자가 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젠가는 자기들도 사자 우리에 던져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확산되리라고 걱정할 것입니다. 만약 그 공포가 심각해지면 게임이 제공하는 쾌감의 수준을 훨씬 넘어설 것이고, 그러면 공리주의자들은 게임을 금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재미삼아 그리스도인을 살벌한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를 고작 그런 계산에 근거해 금지
한다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이 빠진 게 아닐까요?
비슷한 의문은 오늘날에도 야기되고 있습니다. 테러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정당화 할수 있을까요?
시한폭탄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당신은 미국중앙정보국 지역국장이고, 어느날 테러 용의자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이사람이 언젠가는 맨하탄을 폭파할 핵무기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가 이미 폭탄을 설치했다고 의심할 근거도 있습니다. 시간은 자꾸가는데 용의자는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며 폭탄의 위치를 실토하지 않을 경우,
그가 폭탄설치된 장소를 말할때 까지 고문을 해야 옳을까요?
공리주의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문은 용의자에게 고통을 주지만, 폭탄이 터지면 죄 없는 수천 명의 목숨이 날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공리주의자들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줄 지언정 여러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고문해도 된다는 논리를 펼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리처드 체니 전 미국부통령이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에게 강력한 고문기술을 사용한다면 이후 미국을 겨냥한 테러 공격을 막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공리주의 논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리주의자가 고문을 선호한다고는 할 수 없지요. 오히려 심한 고문에 의한 자백은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니기에 고문이 효과가 없다는 주장도 재기합니다. 또한 우리가 고문을 한다면 우리쪽 포로도 상대측으로 부터 더욱
가혹한 고문을 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고문하는 행위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지 않는것입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이익보다는 해가 많아서 부정적 결과를 낳으리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고문을 원칙적으로 반대합니다. 고문이 인권을 침해하고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을 짓밟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는 공리주에게 근거하지 않습니다.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은 공리를 넘어서는 도덕에 기초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말이 옳다면 벤담의 철학은 잘못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행복을 계량하고 통합하고 계산하는 데 기초가 되는 도덕 과학을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기호는 동등하게 계산됩니다. 그리고 도덕적 선택을 과학으로 만들어준다는 약속은 오늘날 경제 분야의 논리적 사고에
상당한 밑거름이 됩니다
다음에 이어 이번 주제를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올레심마니였습니다.